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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정성이다 ♥ ▶정성을 다하지 않으면서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필자의 연구실에는 제자들이 선물한 난(蘭)이 있는데, 너무도 바쁘다보면 난에 물을 주는 것조차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어쩌다 시들어 가는 난을 보게 되면 깜짝 놀라서 물을 주곤 한다. 난의 입장에서 보면 난에게 정성을 쏟지 않기 때문에 필자는 난을 사랑한다고 볼 수가 없을 것이다.
만약에 제자들이 "교수님, 저희가 드린 난을 사랑합니까?" 라고 물을 때도 나는 난을 사랑한다고 결코 말 할수 없을 것이다. 사랑한다고 말한다면 이처럼 뻔뻔스러운 넌센스는 아마 없을 것이다. 내가 난을 사랑한다고 말한다면 아마도 난은 속으로 "사랑은 무슨 놈의 사랑! 얼빠진 소리도 잘 하는군!" 하며 비웃을 것이다.
본래 사랑이란 상대방의 생명이 성장하고 발전하는데 필요한 적극적인 도움이 될 때 비로소 성립한다. 말로는 사랑한다고 하면서 상대방의 생명에 필요한 것들을 충족 시켜 주지 않고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사랑이 아닌 오히려 무관심이다. 우리는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상대방에게 도움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으면서 사랑한다고 말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래서 사랑은 상대방에 대한 적극적인 관여요 행동이라고 프롬은 사랑을 정의하고 있다. 남을 도와 줄 수 있기 위해서는 그 자신이 능력을 갖지 않고도 안 되기 때문에 프롬은 사랑을 고도의 기술로 보았고, 이를 습득하려면 '훈련' '인내' '집중'과 최고의 관심이 요구된다고 보았다. 이와 같은 사실을 우리는 잘 모르기 때문에 사랑에 실패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우리는 사랑이 과연 무엇인지 사랑을 하며 가르치는 부모는 물론 교사들도 사랑의 본질을 잘 모르고 사랑하고 있는 경우가 있는데 다음과 같은 경우가 바로 대표적인 사례이다.
양옥선 선생님은 "나는 아이들을 사랑한다" 고 스스로 자부하면서 17년 동안이나 교직생활을 하고도 그 세월이 문득 공허하게 느끼는 것은 왜 그럴까? 이에 대한 근본적인 이유를 양옥선 선생님은 다음과 같이 스스로 밝히고 있다."아마도 그 까닭은 어떤 대상을 어떻게 사랑했는가에 대한 명백한 답변을 할 수 없기 때문이며, 또한 그것을 알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했기 때문이다."
임광순 선생님도 사랑은 우연히 와서 활활 타오르는 어떤 정열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이 같은 사랑의 잘못된 개념이 바뀌어진 것은 반평생이 지난 뒤였다고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랑은 그냥 와서, 우연히 와서 활활 타오르는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했었다. 그래서 하염없이 그런 사랑을 기다렸었다. 지금은 그런 사랑을 기다렸었다. 지금은 그런 사랑이 나에게 없지만 언젠가는 오겠지 하면서...... 하지만 인생의 절반을 살았다고 생각되는 지금, 그 생각은 바뀌었다. 내가 상대를 끊임없이 사랑해 주어야 나에게도 그 만큼의 사랑이 베풀어진다고 말이다. 또한 사랑 하나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많은 다른 사랑이 밑받침이 되어야 한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본래 사랑이란 내가 먼저 베풀 때 받을 수 있는 것으로써 그것은 수많은 능력의 바탕 위에서 이루어진다. 이 같은 사실을 안 임광순 선생님은 늦게 나마 깨닫게 된 것이다.
우리 부모들 중에서도 이 같은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자녀들의 사랑에 실패하는 경우가 너무도 많다. 무엇보다도 자녀교육에 정성을 쏟지 않으면서 나는 자녀를 사랑하고 있다고 결코 말할 수가 없다. 상대방에 정성을 다하여 상대방의 생명이 성장하고 발전하고 유지하게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일찍이 칼라일은 인간은 정성을 드리지 않고는 구두 한 켤레도 제대로 만들지 못한다고 하였다. 필자는 이와 같은 칼라일의 지적이 진리임을 체험을 통해서 최근에 깨달았다.
너무 바쁘게 살다보니 구두를 맞출 시간도 없어서 구두 방에서 맞추지 않은 기성화를 추석 바로 전날 사 신고 처갓집에 간 일이 있다. 그 때는 몰랐는데 몹시도 비가 오는 날 필자가 신고 있던 기성화 속으로 빗물이 들어와 양말이 젖어 어려움 겪게된 쓰린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 때 필자는 구두 한 켤레도 정성을 다해 드리지 않고는 만들지 못한다는 칼라일의 지적이 진리임을 확신한 것이었다. 구두 한 켤레를 만드는 데도 마음을 다하는 정성이 필요한데 하물며 인간을 길러내는 자녀교육에 정성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진정으로 자녀를 사랑한다면 자녀에게 정성을 다해야 한다. 정성을 다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정성이 없는 사랑은 거짓 사랑이요, 신뢰할 수 없는 사랑이다. 따라서 정성을 다하지 않고는 우리는 진정 사랑한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정성을 다할 수 있는가? 사랑은 상대방에게 정성을 다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정성을 다할 수 있는가? '공든 탑이 무너지랴' 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정성을 들여서 한 일을 틀림없이 성공할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정성을 들여도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정성을 들여도 정성을 잘못 들이면 노력만 실컷 하고도 실패하는 경우가 너무도 많다. 따라서 정성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가 중요한 문제이다.
성경을 보면 '네 몸을 사랑하듯 네 이웃을 사랑하라' 고 하였다. 바꾸어 말하면 네 몸에 정성을 들이라고 할수가 있다. 우리가 자녀들에게 그래도 정성을 들이는 것은 자녀가 바로 자기 자신의 일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종족보존이라는 생물학적 차원에서 본다면 우리 부모들은 자녀들을 통해서 자기의 생명을 유지한다고 볼 수가 있다. 우리 부모들이 자기를 사랑하는 이상으로 자녀를 사랑하는 것은 바로 자기 자녀가 자기의 생명이며 자기를 이어줄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정성을 기울이기 위해서는 바로 상대방이 나 자신이라고 생각하고 신뢰를 해야 한다. 바꾸어 말하면 너는 바로 나의 일부이고 나는 너의 일부이다라고 보아야 한다.
우리는 둘이면서 하나요, 하나이면서 둘이라고 하는 동일체의식이 있을 때 우리는 상대방에게 정성을 기울일수가 있다. 자기를 창조한다는 생각으로 정성을 다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가장 위대한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때의 기쁨이나 보람은 다른 어떠한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고귀한 것이다.
사랑학교수로 유명한 버스카글리아교수는 자기창조의 기쁨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랑은 자기를 창조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 기쁨 중 가장 큰 기쁨은 자기 삶을 창조하고 있다는 인식이다." 진정한 의미의 사랑은 자기창조이다. 모든 사랑은 자기창조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의 구라다 씨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게 아닌가? "인식적인 사랑은 자기를 창조하고 지탱하기 위한 생명의 가장 엄숙한 노력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개인의식이 순간적인 존재를 떠나 확실하고 원시적이고 영원한 참된 생명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가장 엄숙한 종교적인 요구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랑은 그것 자체가 종교적이다. 이리하여 사랑은 생명의 내부적인 열과 빛의 원천일 수가 있다. 결국 사랑은 위대한 힘이요 불이다. 사랑은 인간을 불태울 수 있는 위대한 힘을 가진 불가사이한 존재이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할 정도로. 사랑은 하늘도 감동시킬 수 있는 위력을 가진 기적을 일으키는 힘이다.
사랑은 기적을 낳는다. 사랑은 사람을 움직이고 하늘을 움직인다. 사랑이 정성이 될 때 진정한 의미의 사랑이며 위대한 힘을 발휘한다. 정성을 다하려고 하는 노력은 결코 다른 사람에게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상대방에게 정성을 다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이 나 자신과 하나라고 인식해야한다. 너와 내가 하나라는 공동체의식이 바로 사랑의 근원이다.
(글:김용숙-서울교육대 교수,한국아동교육협회 회장,교육학 박사) |